[윤상길의 행복글방] 역사드라마, 여성 중심으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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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길의 행복글방] 역사드라마, 여성 중심으로 재구성
  • 입력 : 2021. 11.15(월) 11:18
  • 윤상길 한국미디어콘텐츠협회 자문위원장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포스터. 드라마는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 성덕임의 이야기로, 여성의 선택에 대한 자유를 표현하고 있다. / MBC
또 한 편의 역사드라마가 시청자를 만났다. 지난 12일 방송을 시작한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The Red Sleeve, 극본 정해리, 연출 정지인)’이다. 극중 주인공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후궁인 의빈 성씨 성덕임이다. 정조는 남성그룹 2PM 출신인 준호(이준호)가, 성덕임은 아역 출신인 25년차 배우 이세영이 연기한다.

이 드라마는 주제의 신선함과 독특함으로 주목을 받을만하다. 이제까지의 역사드라마와는 달리 서사 구조를 여성 중심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우선 제목을 보자. 과거 대부분 역사극의 제목은 ‘이조여인잔혹사’처럼 조선 여인 핍박의 역사를 직접 표현한다. 조선시대 사회적 악습 때문에 희생되어야 했던 여인의 삶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궁중으로 제한했지만, 조선시대 여성의 정체성을 확장하는 제목으로 설정됐다. ‘붉은 끝동’은 조선시대 궁녀가 옷소매 끝을 붉게 물들인 저고리를 입은 데에서 유래한다. 옷소매의 붉은 끝동은 왕의 여인이라는 징표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재다. 그들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그저 순종적으로 왕과 왕족들을 모시는 허수아비 인형들이었다.

이 드라마는 조선시대, 궁궐 내 기본적인 생활 전반을 관장하는 어엿한 여관(女官)으로서, 궁녀들에게도 그들만의 당찬 꿈과 행복이 있었으리라는 가정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것은 방송 2회째 덕임의 대사에 잘 나타난다. 덕임은 궁녀 동료에게 “선택하며 살고 싶다”고 의중을 드러낸다. 인간에게 있어 예나 지금이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은 곧 ‘자유’를 뜻한다.

인간은 늘 ‘선택’하며 살아간다. 먹고 자고 관계를 맺고 어느 하나 선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이 좌절될 때, 말 못하는 유아조차도 울고불고 몸부림으로 반응한다. 하물며 성인 여성의 ‘사랑’에서 ‘선택의 자유’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곧 정체성의 강제 상실이며, 나아가 인간으로서 여성 존재를 포기하라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까지의 역사드라마는 여성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성도 이를 숙명으로 여기고 살았다. 그러나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성덕의 말처럼 선택하며 살고 싶은 여성을 그린다. 이 드라마는 강미강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여성의 ‘선택의 자유’를 최대한 표현하고 있다.

역사드라마를 말할 때 일부 비평가들은 ‘고증’을 지나치게 요구한다. 자칫 역사 왜곡으로, 다음 세대에게 역사를 잘못된 인식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지금은 “역사드라마에 각색을 허용하자”는 분위기이다. 역사드라마는 보통 ‘팩션 사극’으로 불린다. 사실(fact)과 허구(fiction)의 결합이어서이다.

KBS 2TV 월화드라마 ‘연모’ 포스터. 조선시대에 여성이 남장을 하고 세자의 역할을 하는 철저한 ‘팩션’ 드라마다. / 이야기사냥꾼, 몬스터유니온
K-드라마가 세계의 중심에 놓인 시대다. ‘오징어게임’이 세계 1위 드라마가 되고, 한국 드라마와 그 콘텐츠 수출이 세계 최고 수준인 21세기를 살고 있다. 그래서 역사드라마 각색도 세계 시장에서 공감대를 끌어내는 보편적 서사로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원작 소설도 그렇게 쓰였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최고 권력자는 남성인 왕이다. 과거의 각색은 남성인 왕 중심의 리더십만을 전면에 배치했다. 하지만 21세기에 방송된 이 드라마는 리더십(왕)이 아닌 파트너십(궁녀)을 요구한다. 리더십이 ‘중심’적 보편성, 즉 지배자 중심, 남성 중심에 입각해 있다면, 파트너십은 중심적 보편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보편성 구성을 추구한다.

21세기 역사드라마 각색의 대안적 패러다임은 “젠더 불평등 관계성을 해체하는 방법론이어야 하며, 그것은 파트너십이어야만 한다”라는 사실을 ‘옷소매 붉은 끝동’은 보여주고 있다. 이 방법론을 방송 중반에 접어든 KBS2 역사드라마 ‘연모(극본 한희정, 연출 송현욱)’는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연모’는 쌍둥이로 태어나 여아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졌던 아이가 오라비 세손의 죽음으로 남장을 통해 세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러운 궁중 로맨스 드라마다. 이소영 작가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조선 15대 왕인 혜종(연산군) 시대가 무대인데, 철저하게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남장을 하고 세자 노릇을 하다니, 드라마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2008년 SBS에서 방영한 ‘바람의 화원’은 혜원 신윤복을 남장 여자로 설정한 팩션 역사극이었는데, 이때도 역사 왜곡이라며 여기저기에서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여기에 비하면 ‘연모’는 몇 수 앞서가는 각색이다. 21세기식 역사드라마 각색이다. 제작진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라는 팩션 드라마 원칙을 지키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를 가늠하는 넷플릭스 인기 순위에서 11월 13일 현재 ‘연모’는 ‘오늘의 한국드라마’에서 1위, ‘세계 드라마 인기 순위’에서 8위에 올라 있다. 이 드라마가 세계인의 눈에 웰메이드 드라마로 비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역사드라마의 세계 시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자국민의 시선보다 세계인의 눈높이에 맞추는 시대다.

한국의 역사드라마는 중국처럼 과거 역사를 ‘아전인수’로 해석해 ‘중국공정’의 수단으로 악용하지 않는다. 일본처럼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며 역사 새로 만들기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란 각색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K-드라마에 열광하는 세계인의 안목을 믿기 때문이다.

부산일보·국민일보 기자, 시사저널 기획위원, TV리포트·티브데일리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소관 한국미디어콘텐츠협회 자문위원장으로 있다. ‘장군의 딸들’, ‘질투’, ‘청개구리 합창’, ‘충무로 25시’ 등 소설과 시나리오 희곡 평론집 등을 집필했다.
‘중국공정’을 일삼는 최근의 중국역사극을 보면 액션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온갖 괴물이 등장해 인간과 겨루는 황당무계하게 각색되어 있다. 그들의 역사극이 세계인에게 외면 받는 이유는 이 이율배반의 드라마 각색에 있다. 그들의 역사극에는 메시지가 빠져 있다. 오로지 ‘재미’만을 강조한 황당한 각색물이다.

한국의 역사극은 ‘옷소매 붉은 끝동’이나 연모‘처럼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로 여성 중심의 ’선택의 자유‘에 방점을 찍는 차별화된 각색이다. 그 저변에는 아직도 피압박 계급으로 남아 있는 여성들을 위한 응원이 깔려 있다. 불평등 계급으로 사는 이 땅의 여성들을 위한 드라마다.

한국 역사는 여성의 역사이다. 여성이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의 문이 열리면 바로 여성이 등장한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이 그렇고 ‘연모’의 세자 이휘가 그렇다. 여성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번영했다.

설혹 각색된 인물일지라도, 성덕임이나 세자 이휘처럼 ‘선택의 자유’를 일궈낸 역사 속의 여성을 드라마로 만나는 일은 반갑다. 이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환경을 탓하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의지의 여성을 알림으로써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밝은 미래를 준비하자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 본지에 실린 칼럼은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뉴스코프의 공식적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윤상길 한국미디어콘텐츠협회 자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