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길의 사람들] 명배우 최무룡은 어디에 있는가

칼럼/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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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길의 사람들] 명배우 최무룡은 어디에 있는가
  • 입력 : 2020. 11.23(월) 11:21
  • 배우 권병길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에서 퇴역군인 역할을 맡은 최무룡. 그는 문학성 짙은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성격 배우’이자 예술가로서 자리를 구축해나갔다. / KBS1 방송화면
1960년에 제작된 영화 ‘폭풍의 언덕(원작 에밀리 브론테, 감독 백호빈)’에 나오는 아주 오래된 집. 이 고가(古家)는 밤만 되면 창틀이 폭풍에 덜컹거렸다. 세찬 바람에 얼굴을 내미는 청년, 히스클리프 역의 최무룡(1927~1999)이다.

그가 폭풍의 언덕을 바라보며 소복(素服)을 입은 캐서린을 향해 소리친다. 그 연기자 최무룡의 애절한 표정은 가슴에 파고를 일으킨다. 그의 간절한 사랑의 메시지가 영상에 비치는 순간 누구나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팬이 되고 만다.

그 무렵 최무룡은 유두연 감독의 ‘카츄샤(1960)’에서 카추샤 상대역 네흘류도프 역을 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번한한 노필 감독의 ‘심야의 고백(1961)’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로 등장한다.

두 작품 모두 세계적 문호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문학성 짙은 작품에 선택받음으로 그의 이미지는 ‘성격 배우’로 각인되기 시작한다. 이는 문학성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국내 작가 원작의 유현목 감독 영화 ‘오발탄(원작 이범선, 1961)’, ‘잃어버린 청춘(나소운 각본, 1957)’에서 그가 주연으로 발탁된 사실로도 확인된다. 그는 분명 멋과 반항적 특징을 지닌 시대의 배우임이 분명하다.

선생은 1999년 갑자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당시 나이 71세, 한 시대의 청춘의 상징이었던 그는 또 한 시대의 막을 내리는 청춘의 상징이었다. 모든 천재의 말년이 그렇듯 선생의 말년도 초라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잘 나가던 그에게도 시련은 왔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어도 돈이 늘 없는 영화에 취한 예술가이었다. 그의 생전의 삶의 방식은 낭만에 취한 로맨티스트로, 영화 속에 나타나듯 청춘예찬의 꿈을 그리는 배우였다.

최무룡과 함께 연기한 동료 배우들은 그를 ‘연기잘하는 배우’, ‘존경하는 선배’로 회고한다. 그가 떠난 뒤 아들 최민수가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 SBS플러스 방송화면
선생의 연기는 동시대 다른 유명배우와 구분된다. 그는 자연주의적 연기의 소유자이었다. 근엄한 김진규와 강렬한 신영균과 정열의 신성일과 비교해 최무룡의 연기는 자신만의 연기세계를 구축한 이지적이며 반항적이었으며 로맨틱했다.

어느 노인의 추억이다. 노인이 묻는다. “혹시 최무룡씨 영화를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한 젊은 여성은 “우리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최무룡 선생을 너무 좋아해 그 분의 영화를 빠지지 않고 보았다며 최무룡이란 이름을 입에 달고 사셨다”고 기억한다. 실제로 필자가 들은 이야기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 흑백 필름 속의 그의 모습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문화적 무지로 역사적으로 귀중한 필름들이 사라졌고, 그 후에 영상자료원이 생겨났다. 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과 다름 아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해랑 연출)’에서 햄릿 역을 한 배우로 기록되어 있다. 1951년의 일이다. 당시 중앙대학 학생극에서였다. 그 후 연극 ‘햄릿’은 배우 김동원(1916~2006) 선생으로 여러 번 공연되었다.

한국전쟁이 나자 극단 신협은 대구 부산 등지에서 문화에 목마른 시민들에게 셰익스피어 작품공연을 통해 위로를 전했다. 공연마다 만원으로 극장을 메운 그 속에서 최무룡이란 배우가 성장하고 있었다.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중반 ‘잃어버린 청춘(감독 유현목, 1957)’, ‘청춘일기(이병일, 1959)’, ‘자나 깨나(홍성기, 1959)’, ‘꿈은 사라지고(노필,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별의 종착역(김영환, 1960)’, ‘이별의 부산정거장(엄심호, 1961)’, ‘이 순간을 위하여(이강원, 1961)’, ’낙동강 칠백리(이강천, 1963)’, ’기적(이만희, 1967)’ 등으로 선생의 필모그래피는 이어진다.

당시 그는 배우 김진규와 라이벌 관계로 좋아하는 팬들의 선택이 확연하게 구분될 정도였다. 두 사람 다 잘 생긴 미남이었지만 연기 표현에서는 크게 다른 면모를 보인다. 배우는 자신이 생명처럼 간직하는 내면적 세계가 있다. 최무룡이란 배우가 그렇다.

배우. 인물평론가.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역임. 1968년 연극 ‘불모지’로 데뷔, 수많은 연극 영화 TV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대표작으로는 모노드라마 ‘별의 노래’와 연극 ‘햄릿’ ‘동키호테’ 등, 영화 ‘남영동 1985’ ‘마더’ ‘그때 그사람’ 등, TV드라마 ‘보이스’, ‘아이리스’ ‘제4공화국’ 등이 있다. ‘극단 자유’ 소속으로 프랑스 스페인 등 세계연극제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국제예술협회 영희연극상,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현대연극상 연기상, 서울 연극제 연기상, 최우수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최무룡은 명배우다. 고 김기덕 감독(1934~2017)은 그를 보고 “다시 나오기 힘든 배우”로 평한다. 김수용 감독은 “몸 전체로 연기하는 배우”, 김종원 평론가는 “맑은 음성에 눈빛의 연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배우 이순재는 “이 시대에 가장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 정확한 발음 내면적 메소드 연기는 추종을 불허한다”고 설명한다.

같이 공연을 많이 한 배우 김지미와 윤정희는 “나운규 이후 영화에 빠진 가장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평한다. 배우 엄앵란은 “신사 배우 최무룡은 상대 배우를 보고 ‘내 눈을 보라’면서 연기를 지도하던 존경하는 선배”라고 고백했다. 배우 남궁원은 “가장 롤모델로 생각했던 배우”라고, 고 신성일은 “최무룡 선배님이 가신 후 꿈에 나타나 천도제를 올려주고 한을 달랬다”고 말했다.

이제 최무룡 선생이 가신지 21년이다. 한 시대 수많은 작품을 남긴 선생이다. 필름이 남아 있는 작품들 가운데는 영화 제작으로 크게 빚더미에 앉아 정신없이 팔려간 작품들도 일부 영상자료원에 남아 있다.

그가 노래를 잘하고 잘생기고 목소리가 미성이고 한때 국회의원(지역구 파주, 13대)이고 여성들의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촌평이다. 그를 ‘위대한 배우’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은 배우를 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고, 그 선생의 시대에 선생만이 맞는 역을 스크린에 남겼고, 뭇 여성의 사랑을 받은 매력의 배우였다.

지금도 어둠이 깔린 창경궁 정문 앞을 지날 때면 어느 영화의 흔적인지 바바리코트를 입고 전쟁 중에 헤어진 애인(조미령)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서성이던 영화 속 그 모습이 필자의 뇌리에 떠오른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의 잔영은 긴 여운을 남기면서 영화를 사랑하고 좋아했던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 본지에 실린 칼럼은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뉴스코프의 공식적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배우 권병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