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길의 사람들] 한국 영화의 꽃 김지미

칼럼/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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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길의 사람들] 한국 영화의 꽃 김지미
  • 입력 : 2020. 11.03(화) 11:53
  • 배우 권병길
배우 김지미는 당대 최고의 연기로 영화계에서 가장 안정된 팬을 확보하고 있었다. 때문에 충무로는 그의 남성 편력에도 도덕적 질타 대신 모셔가기 바빴다. / 뉴시스
배우 김지미(1940~)를 처음 인상 깊이 본 영화는 ‘카츄샤(1960, 톨스토이 원작, 유두연 감독)’였다. 1959년 서울로 상경, 4·19혁명이 나던 해, 당시 영화계는 외국의 유명한 문학 작품을 번안해 영화화 한다던가, 국내의 유명소설을 각색해 문학성이 짙은 영화들로 의욕 넘치던 때였다. 본격 신성일의 청춘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이다.

김지미는 김기영 감독의 ‘황혼 열차(1957)’로 데뷔, 혜성처럼 영화계에 나타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이름 있는 남자 배우들이 “저 배우와 함께(?)”하며 입맛을 다시게 하는 신인배우였다. 아담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은 화면 속에서 한 송이 청초한 꽃으로 관객들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배우는 감독의 품에 있어야 길이 열린다”는 일반적 정설대로 당시 멜로영화의 귀재 홍성기 감독은 김지미를 이내 끌어안았다. 그리고 작품의 중심에 놓고 가련한 여인으로 만들어 나갔다.

역시 홍성기 감독은 시대를 읽어내는 감독이었다. 그는 김지미를 화면으로 이끌어 영화 ‘별아 내 가슴에(1958)’로 시작하여 ‘비극은 없다(1959)’, ‘산 넘어 바다 건너(1958)’, ‘청춘극장(1959)’, ‘별은 창 넘어로(1959)’ 등을 통해 별의 탄생을 알렸다.

김지미는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멜로영화의 귀재로 불린 홍성기 감독과 결혼해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 실패로 부부 사이가 틀어졌다. / 영화 스틸컷

김기영 감독을 만난 운명과 홍성기 감독 품에 안긴 운명과 명콤비 배우 최무룡을 만난 운명은 부동의 스타 김지미의 탄생을 알렸고, 그때부터 영화사상 최다 작품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대중 속에 살아 있는 배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스타 김지미를 여기저기에서 모셔가기 위해 충무로는 격전장이 되었다. 김지미가 배우 최무룡과 간통사건으로 구속이 되자 영화계는 그를 불륜의 마녀로 몰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김지미가 나와야 한국영화가 돌아간다”며 석방을 간절히 요망하는 분위기였다. 도덕적 질타를 받는 듯 했지만 이내 관객도 그녀를 받아들였다.

김지미의 영화 인생은 언제나 전성기였다. 데뷔부터 영화를 떠날 때까지 인기는 변함없이 높았고, 작품 수에서도 단연 다작(600여편)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20대 초반 그의 영화들은 달콤한 남녀의 순애보적인 사랑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슬픔은 강물처럼(정창화 감독, 1960)’, ‘길은 멀어도(홍성기 감독, 1960)’를 비롯해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박종호감독, 1959)’, ‘장마루 촌의 이발사(최훈 감독, 1959)’, ‘고개를 넘으면(이용민 감독, 1959)’ 등이 그 같은 작품이다.

김지미와 최무룡이 간통죄로 구속될 당시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두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이별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김지미의 인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우선 영화계에선 가장 안정된 팬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과 그의 고전적 이미지부터 동시대 현대 여성으로의 변신, 억압 받는 여인상 그리고 환락가의 여성까지 그는 맡겨진 역할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고,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배우가 저런 처지라니!” 하는 식으로 영화 속 인물에 빠져들게 하면서 관객이든 제작자든 감독이든 그녀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특히 배우 김지미는 어느 배우와 만나도 조화를 이뤘다. 작은 몸이지만 늘 중심에서 빛났다. 당시 유명 남자배우들,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 신성일 남궁원 등은 그녀와의 공연에서 늘 화제를 몰고 왔다.

김지미는 보통사람의 일상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영화 속에서 산 인생은 물론이며, 파란만장했던 실제 삶을 비교하더라도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인생을 살았다. 당시 배우들은 화려한 인기를 누렸으나 매일 피로가 겹치는 삶을 살았다. 어느 배우는 “잠을 한번 실컷 자 봤으면”하고 호소를 할 정도였다. 특히 김지미는 근 30년에 이르는 최고의 전성기가 지속됐던 만큼 다른 배우보다 피곤한 삶을 살았다고 짐작된다.

김지미의 영화 속 사랑과 실제의 사랑은 여전히 대중의 관심거리이다. 형식적이었을까, 사실적이었을까. 김지미의 남성 편력은 늘 화제가 되었다. 팬들은 그의 실제 사랑을 아쉽고 안타깝게 여긴다. 한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팬들의 입장과 달리 그와 만난 남성들과의 사랑은 벼랑 끝 모험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의 운명일 것이다.

김지미는 임권택 감독의 ‘잡초’를 시작으로 연기 변신에 나섰다. 이후에도 임권택 감독은 ‘티켓’과 ‘길소뜸’에 김지미를 기용해 농익은 연기를 이끌어냈다. / 영화 스틸컷
홍성기 감독과는 첫 만남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홍성기 감독은 신상옥 감독과 무모하게 대결한 ‘춘향전’의 흥행실패로 감독 수명에 영향을 주었고, 이로 인해 이들 부부 사이에 금은 가고 있었다. 두 번째 주인공 최무룡과는 영화 속의 연인이었다. 세기의 커플이 많으나 김지미 최무룡처럼 잘 어우리는 배우 커플도 드물 것이다.

그들은 영화 속의 연인이 실제 부부로 만나짐에 대한 기대는 어느 지점에서 ‘불과 물’이 될 것을 예견치 못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감독으로 도전한 최무룡, 그는 돈을 모르는 영화 예술가였다. 그를 위해 헌신과 뒷받침하다 한계에 부딪힌 동반자로 이젠 서로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변명으로 대중들에게 의역을 남기고 헤어졌다.

김지미의 깊은 연기는 그의 배우 인생 후반에서 나온다. 물론 젊은 시절의 연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온 삶의 상처가 아물어 갈 무렵 그의 연기는 농익어 갔다. 초기에 박상호 감독의 ‘선술집 처녀(1963)’ 김기덕 감독의 ‘77번 미스김(1963)’과 같은 작품으로 변신을 시도했고, 이규웅 감독의 ‘요화 배정자(1966)’,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1961)’ 등 사극에 도전, 폭넓은 연기 세계를 펼쳤다.

배우. 인물평론가.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역임. 1968년 연극 ‘불모지’로 데뷔, 수많은 연극 영화 TV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대표작으로는 모노드라마 ‘별의 노래’와 연극 ‘햄릿’ ‘동키호테’ 등, 영화 ‘남영동 1985’ ‘마더’ ‘그때 그사람’ 등, TV드라마 ‘보이스’, ‘아이리스’ ‘제4공화국’ 등이 있다. ‘극단 자유’ 소속으로 프랑스 스페인 등 세계연극제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국제예술협회 영희연극상,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현대연극상 연기상, 서울 연극제 연기상, 최우수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본격적인 연기 변신을 하던 시기는 임권택 감독과 만남으로 시작된다. 임권택 감독은 70년대 김지미 주연의 ‘잡초(1971)’라는 작품으로 자신의 영화감독 변신에 자신을 얻었고, 그 후 ‘티켓(1986)’과 ‘길소뜸(1985)’에서 그를 주연으로 기용하며 김지미의 농익은 연기를 이끌어냈다.

이제 나이 80을 넘어가는 배우 김지미. 그의 지난 삶은 수많은 추억과 남다른 사랑과 아픔의 세월이 대변한다. 모든 것들은 지나갔고 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남은 생을 진정 인생의 의미를 반추하며 긴 영화를 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영화계를 은퇴했다. 하지만 여전히 은퇴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또 더 좋은 연기를 볼 수 있는 시기에 영화계를 떠났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색 짙은 원숙함으로 자연의 빛과 남은 생을 살아가는 대배우 김지미, 그리고 그와 함께 늙어가는 팬들이 합창을 하듯 옛날을 추억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 본지에 실린 칼럼은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뉴스코프의 공식적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배우 권병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