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길의 사람들] 북(北)으로 간 배우들

칼럼/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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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길의 사람들] 북(北)으로 간 배우들
  • 입력 : 2020. 10.12(월) 14:10
  • 배우 권병길
황철은 1930~1940년대 시대를 풍미한 배우다. 당시 그의 활동 주무대였던 동양극장은 관객이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월북한 뒤로는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으며 문화예술계의 대부로 기록됐다. / 조선향토대백과
황철(1913~1961)은 근대 연극사에 이름을 남긴 명 연기자이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게 생소한 것은 해방 공간에서 활동하다 1948년 8월, 북을 선택해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전성기는 1930년대부터 북으로 가기 전까지다.

그는 동양극장(현 문화일보사 자리)의 청춘좌를 중심으로 낙랑극회, 극단 아랑 등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당시 영화는 서구 중심으로 발전 단계에 있을 뿐 우리에겐 겨우 무성영화 정도 아니면 유성영화라지만 발성, 화질이 좋지 않는 등 여러 여건이 대중과 거리가 있었다. 그 시절 대중 중심 예술로는 연극이 유일했다. 따라서 배우의 꿈을 안고 많은 지망생들이 극단에 몰려들었다.

시대마다 대중의 우상은 존재한다. 예나 지금이나 유명 배우도 우상으로 자리한다. 대중에게 황철 선생은 우상이었을까. 북으로 간 황철 선생은 전문 원로 연극 영화인들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배우이다.

그러나 연극계에서 그는 ‘레전드’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당시 배우들과 공연을 직접 본 관객의 입으로 전해진 그는 전설 같은 존재이다. ‘다시 나오기 힘든 배우’, ‘백년에나 나올 수 있는 능력의 배우’라고 학자들까지 인정하고, 전설로 구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황철의 고향은 충청남도 청양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친은 청양 군수를 지냈고, 춘천 고등고보를 다녔다. 그의 청년시절은 누구나 그렀듯이 광대가 천시되던 시절이다. 자신이 배우가 된다는 것조차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던 시대였으니 주변에서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타고난 끼는 어느 계기를 만나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는 지방을 떠도는 연극단, 소위 유랑극단을 보고 배우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살 나이에 막 창단된 신파극단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를 찾아가 연구생으로 배우세계에 입문하고, 그 곳에서 연극에 데뷔한다.

그는 신인 배우로서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데뷔 작품에서 일약 주연으로 발탁된다. 주연 배우 발탁 사연 또한 드라마틱하다. 1931년 ‘조선연극사’에서 공연을 준비 중이던 연쇄극 ‘청춘난영’의 주인공 이경환이 아편을 피우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가고 만 것이다. 그리고 황철은 이경환의 대역으로 발탁되어 ‘청춘난영’에서 첫 주인공을 맡는 행운의 주인공이 된다.

그의 진가는 두 번째 작품에서 나타난다. 이때의 캐스팅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데뷔작에서 그와 공연했던 배우 강홍식(강효실 부친, 최민수 외조부)이 주역으로 내정된 작품인데, 강홍식이 지방공연을 다니기 싫다며 주저하자 극단 측이 그에게 다시 주연을 맡겨 이후 극단의 주전배우로 도약할 수 있었다.

황철 선생의 목소리는 당대 최고로 꼽혔다. 극장 객석 끝까지 들렸고 매력적인 저음의 발성과 명확한 발음의 배우로 소문이 자자했다. 고인이 된 배우 김동원과 고설봉은 “최고의 목소리를 지닌 배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황철은 이미 정상에 서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배우 활동 주무대였던 당시의 동양극장은 공연 레퍼토리마다 관객이 연일 장사진을 이루는 최고의 극장이었다. 극단 운영자(홍순원)는 배우들에게 월급을 지급했다. 한국연극사에서 배우에게 월급을 준 것은 이것이 최초이었고 당시로서는 ‘사건’이었다. 황철 선생은 동양극장의 핵심 배우였다.

1935년 서울에 설립된 동양극장. 이 극장에서 초연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해방 전 최대 흥행작으로 꼽힌다. 당시 홍도의 오빠 역을 황철이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황철 선생이 정상의 배우로 인정받고 있을 무렵 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에서 1936년 7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공연하면서 그를 주연으로 기용한다. 이 작품은 당시 평단으로부터 ‘저질 작품’이라고 버림받던 희곡(임선규 작)을 박진이 연출했다. 지금까지 애창되는 대중가요 ‘홍도야 우지 마라’가 바로 이 연극의 주제곡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대성공을 이룩하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연극을 보기위해 관객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뤄, 오히려 관객을 쫓기 위해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됐다. 그 유명한 명월관 기생들이 ‘황철 모시기’ 경쟁을 펼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의 유명세는 2001년 KBS2TV에서 ‘동양극장(연출 김종창)’이란 드라마로 시청자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당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배우 황철은 많은 배우들과 공연을 했다. 또 하나의 당대의 명배우 심영을 비롯해 서일성, 지경순, 지계순, 김선영 등이 그의 연기 파트너로 유명세를 같이 했다. 그리고 이들 배우 일부와 김연실, 박영신, 문예봉(영화배우), 문정복(배우 문정숙의 언니), 함세덕(작가), 임선규(작가), 안영일(연출가) 등 당대 알아주던 이 땅의 많은 유명 배우와 작가 등이 월북했다. 그렇게 남북으로 나뉘어 한국 연극과 영화는 절름발이 상황에 놓인다.

황철은 왜 월북했는가. 그것은 해방 정국의 이념대결이 빚어낸 우리 민족의 비극에서 유래된다. 당시 우리 연극계는 일본 유학파 중심의 ‘극예술 연구회’가 조직되어 유치진, 서항석, 이해랑 등 소위 민족 계열의 우익 인사들 중심의 연극으로 신연극 운동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 등 번역극을 소개하면서 동양극장 중심의 연극을 신파로 과소평가했다. 그러면서 연극의 계급적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이념을 내세운 좌우 대결 속에 연극 역시 사사건건 갈등이 있었고 한 무대 하나의 연극 동지들이 세포분열을 하기 시작했다. 소위 카프운동의 연속적 좌파 운동은 또 하나의 연극의 이념화로 발전,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 급속도록 좌우 분열을 하게 되었다.

황철의 전성기는 연극 본래의 정신을 이어온 동양극장의 홍해성, 최독견, 박진, 이서구, 송영, 임선규, 박영호 등 연출 작가 아래 우리의 정서를 바탕으로 소위 가극과 악극의 차별성을 유지키 위해 노력했다.

우리 영화 연극계의 어른들인 김승호, 황정순, 고설봉 선생 등이 동양극장에서 활동했다. 배우 최은희 선생은 황철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연극을 시작했고, 백성희 선생은 월북 작가 함세덕 의 발탁으로 오늘 날 연극배우의 대모로 이름을 남겼다.

황철은 당시 3살 아래인 이해랑(1916~1989)선생과 한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서 우의를 다져온 사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이념의 정체성으로 남북으로 갈리어 이해랑은 남쪽의 문화 예술계의 ‘한국문화예술연합회’ 총회장, 예술원 회장, 중앙 국립극단장, 극단 신협 대표,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고 후예들 중심으로 이해랑 연극상을 만들어 매년 시상을 하며 선생을 기리고 있다.

황철은 북쪽의 문화예술계의 대부로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고 교육 문화성 문화상, 최고인민 위원회, 국립극장 단장 등 실질적으로 북쪽 문화예술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이념이 달라 서로 대립하면서도 한편 존중했다. 무대 위에서 배우 이해랑의 격정적 대사에 황철은 크게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황철의 연기를 이해랑은 두고두고 명배우임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해방정국에서 대립했지만, 황철 선생의 월북 전 술을 같이 한 후 헤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배우. 인물평론가.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역임. 1968년 연극 ‘불모지’로 데뷔, 수많은 연극 영화 TV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대표작으로는 모노드라마 ‘별의 노래’와 연극 ‘햄릿’ ‘동키호테’ 등, 영화 ‘남영동 1985’ ‘마더’ ‘그때 그사람’ 등, TV드라마 ‘보이스’, ‘아이리스’ ‘제4공화국’ 등이 있다. ‘극단 자유’ 소속으로 프랑스 스페인 등 세계연극제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국제예술협회 영희연극상,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현대연극상 연기상, 서울 연극제 연기상, 최우수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황철 선생은 해방 전후 남쪽에서 많은 작품을 했다. 낙랑극회에서 함세덕 작 ‘산적’, ‘단종애사’, 쉴러의 ‘군도’, 극단 아랑의 ‘그들의 일생’, ‘김옥균’, ‘동학당’ 등에서 활동했다. 월북 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인민군 소좌로 참전해 명동의 ‘시공관(현 국립예술극장)’에 나타나 “서울 시민 여러분 저 황철이가 왔습니다”라고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반기던 시민들에게 인사를 했다.(작가 차범석 증언)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경기도 평택에서 포격으로 한쪽 팔을 잃게 된다. 그러나 북쪽에서 김일성 주석의 배려로 헝가리에서 수입한 의수를 사용해 당시 유명한 ‘이순신 장군’등의 작품으로 북쪽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황철이라는 한 배우의 월북만의 얘기는 아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연극인으로의 생활은 아주 힘이 든다. 당시의 배우들에게도 빵이 필요했다. 마음껏 작품을 할 수 있다는 북쪽의 선전 선동이 많은 예술인들을 흔들어 놓았다.

‘친구따라 강남가듯’ 당대 최고의 배우 황철의 북쪽 선택이 많은 연극인들의 북쪽행을 결행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이는 불행한 연극 영화의 단면만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정치 문화 학문 등의 크나큰 손실이다. 반쪽의 무대, 반쪽의 인력, 반쪽의 창조를 불러오는 우리의 자화상은 오늘도 그려지고 있다.

※ 본지에 실린 칼럼은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뉴스코프의 공식적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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